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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광야에 서다/ 고유 장편소설/서재필 일대기/독립신문 창간 서재필 이야기

 

 

 

1864년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일곱살 때 상경하여 외삼촌의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살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관복을 입고 출퇴근한지 한 달여가량 후 임오군란 또는 임오군변이라 불리는 구식 군대 군인들의

반란이 있었다.

 

이 무렵 서재필은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의 교류로 개화사상을 받아들인다.

1882년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 된 후 김옥균은 나라에서 서재필의 유학 자금을 타내고 서재필은

일본 토야마 군사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렇지만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자금이 1년여 만에 끊겨 군사학교를 다 마치지지도 못하고 귀국을 한다.

 

1884년 12월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로 돌아가 홍영식은

그 자리에서 죽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박영효, 서광범 등과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인종차별로 인해 다시 정육점에서 성실히 일을 하다가 일요일 마다 나가는 교회에서 로버츠 장로로

부터  존 웰스 홀랜백을 소개받아 홀랜백의 후원을 받아 힐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하는 서재필에게 홀랜백은 목회자가 되어 조선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원했으나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를 얘기하자 서재필에 대한 후원이 중단된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열심히 했음은 물론이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연설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웅변대회에 나가 당당히 2등을 했으며 스포츠에서도 승마나 육상,

창던지기 등에서도 발군의 솜씨를 보였다.

조선에서 창술과 마상무예, 표창 던지기, 태견 등을 연마하였기 때문이고 뜀박질에 타고난 소질이

있어 열다섯 개의 학교가 함께 벌이는 산악 달리기의 대표선수로 참가하여 2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서재필은 미국식 이름을 필립 제이슨이라고 지었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후원의 원조가 끊긴 서재필에게 우연히 어느 노신사를 도와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인 오티스를 소개 받지만 그곳에서도 일감이 없어 막 떠나려 할 때 군복을 입은

손님에게 서재필을 소개해 준다.

그것을 계기로 서재필은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 취직이 되어 낮에는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삼 년간 의학공부한 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어서도 개업을 하지 않고 박물관에 눌러앉아 박물관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세균학,

공중위생학, 방역학 등 연구에 전념하였다.

 

한편 불량배로 부터 난처한 뮤리엘를 구해주는 계기로 뮤리엘과 1894년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사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일어나 대개혁을 단행하는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외

4명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진다.

조선에서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에 임명하여 귀국을 종용하지만 서재필은 귀국을 망설이고 있다.

박영효가 다시 귀국을 권하고 부인 뮤리엘의 호응을 얻은 서재필은 귀국을 하게 된다.

 

귀국 후 외부대신을 맡으라고 하지만 미국 시민이라는 점을 내세워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봉사하겠다며 백성들을 계몽시키고 민주주의르 가르치고 싶다며 신문을 창간하기로 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 했다.

독립신문 창간을 이어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고문이 되었으며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또 공개 강연회를 열어 자신의 선진 지식을 널리 퍼뜨리고 배제학당 강사로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이렇듯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과 강연이나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가르쳤고 민족 독립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꺼린 수구파 정부와 열강의 방해로 다시 1898년 5월 14일 수 백명의 전송을 받으면서

미국으로 추방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다시 병원을 개업하고 사업도 추진하면서 지내다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3,1운동의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안창호, 이승만, 정한경,유일한 등 재미 인사들에게 연락하여

한인자유친우회를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전 세계에 규탄하여 조선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재미교포들을 결속 시키고 독립후원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느라 가산을 거의 탕진하고 서재필의 사업도 결국 파산한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 유일한이 찾아와 유일한과 손잡고 사업을 하다가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의

학장의 귀국 권유로 연희 전문학교 상과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부인에게는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을 하기로 한다.

귀국한 유일한은 조선에서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세웟다.

 

유일한의 귀국과 함께 무역 회사 사장직에서 자연스레 물러난 서재필은 과학의 발전상을 절감하고는

치구에게 이천 달러를 빌려 펜실베이니아 의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환갑이 넘은 나이로 병리학

전문의 자격을 따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전문의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성 요셉 병원에 근무하면서도 서재필은 미국 의학회 잡지에 세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932년에는 평화와 자유라는 책자에 조선의 장래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하지중장의 요청으로 1947년 다시 귀국을 하게 된다.

이승만 세력이 의도적으로 확대시킨 비누론 등으로 생긴 오해를 서재필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 환영 대회에서 자신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고 정치적 야심 때문에 귀국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는 자신은 미군정 관계자들에게 조언을 했으며 라디오 방송에 민족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새로운 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이 끝나자 서재필 지지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정치권의 견제로 또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6,25 소식을 들으며 1951년 1월 5일 밤, 향년 87세에

눈을 감았다.

 

최근 미국 워싱턴의 한국 총영사관 정문에는 서재필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주미 한국 대사관은 한미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수십여 명의 역사 인물

리스트를 만들고 여론을 수렴해 검토한 결과 서재필을 선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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